식물 유전자
소산
식물을 좋아하게 되는 유전자가 있다면, 아마 난 유전적으로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충남 공주와 경남 함양에서 자란 엄마와 아부지는 또래들이 고향 촌구석에서 학교를 다닐 때, 어릴 적부터 도시를 떠돌며 일을 해야 했다. 두 촌사람은 서울 노량진에 한 고시원에서 만나 산동네에 살림을 꾸렸다. 언제나 일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시를 떠날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식만큼은 자신이 자라온 고향을, 자연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학교도 들어가기도 전, 아버지는 늘 새벽같이 나와 남동생을 깨워 동네 언덕 넘어있는 중앙대학교 근처 솔잎을 3개씩 따오라는 말도 안되는 주문을 해왔다. 질질 울면서 일어난 나는 거의 까무라치는 남동생을 부축여 밖으로 나갔다. 어느 날은 정말로 중앙대학교 근처까지 넘어간 가서 솔잎을 따갔고, 어느 날은 집 주변에 있는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아무튼 비슷한 잎사귀를 대충 가져갔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귀신같이 이게 중앙대 근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아채곤 했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졸린 눈을 비비며 비슷한 꼴의 무엇을 찾아내려 애썼다. 덕분에 아직 개발이 안 되거나 진행 중인 동네 뒷산을 샅샅이 다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은 참 열심히도 살았다. 평일에는 어린 자식들을 이웃에 오래 맡기며 늦게까지 일했고 주말은 다 함께 티코를 타고 시골로 내려갔다. 부모의 농삿일을 돕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딸, 아들이 시골에서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 시간들을 좋아했다. 묘마당에서 썰매를 타다가 마을 어른들한테 쫓기고, 냇가에서 글씨가 써지는 돌맹이를 주워 모았다. 할머니가 고추를 심을 땐 고추를 심었고 고구마를 캘 땐 고구마를 캐고 줄기를 걷었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처음 자전거를 배우고, 대보름엔 쥐불놀이를 했다. 그런 기억들은 밀도가 꽉꽉 차 있어서 오래 떠올려도 조금도 닳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시 생활은 녹녹지 않았다. 촌구석 출신의 부부는 지역의 작은 도시로 이사하며, 빚을 내 작은 아파트를 샀다. 안정된 일자리가 없던 엄마는 늘 뭔가를 새로 시작했다. 어느 날은 동네에 있는 호프집 주방에서 일했고, 어느 날은 슈퍼 아줌마를 따라다녔고, 어느 날은 동네 어귀에서 떡볶이와 붕어빵을 팔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엄마의 직업은 화분장사였다. 떡볶이와 붕어빵을 팔던 그 자리에서 엄마는 화분을 팔기 시작했다. 유독 식물을 선명히 구분할 줄 알고, 잘 길러내던 엄마는 과천시장에서 화분을 떼다가 동네에서 팔았다. 처음에는 구둣방 옆에 조금씩 화분을 내렸다 올렸다 했다. 제법 입소문이 났는지 근처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시들하던 화분을 들고 내려와 분갈이를 했고, 엄마가 튼튼히 키워둔 새로운 화분들을 들여갔다. 나중엔 매일 내렸다 올렸다 하기 귀찮을 만큼 화분이 많아져 구둣방 옆에 불법 자바라와 그늘막을 쳐 노상에 가게를 만들었다.
엄마가 길에서 화분을 팔 때 나는 겨우 얻은 1000원을 들고 동네 만화방에서 ‘안녕 자두야’ 같은 만화책을 빌려 엄마의 트럭을 찾았다. 아파트 상가에 세워놓은 1톤 트럭의 천막 안으로 기어 들어가서 만화책을 보고 불량 식품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글씨를 보려 살짝 열어둔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오래된 화분의 축축한 냄새들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역시나 오래 들여다보아도 닳지 않는 풍경 중에 하나였다. 나는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이해하는 청소년이 되어갔다.
어느 날 밤, 이름이 예뻤던 태풍은 쌍용동 구둣방 옆에 있던 노상 자바라와 그늘막과 애지중지한 화분들을 온 동네에 굴렸다. 엄마와 아버지와 질질거리며 울던 동생은 날아다니던 자바라를 움켜쥐고 있었고, 나는 나사렛대학교 앞까지 굴러갔던 화분을 주우러 뛰어다녔다. 태풍이 지나고 화분은 이내 씩씩했었지만, 얼마 후 아파트 상가에 새로 생긴 꽃집의 신고로 장사를 접어야 했다.
그늘이 되어 주었던 트럭이 사라지고, 나는 숨을만한 곳이 별로 없는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학생쯤 되니 냇가에 들어가는 것이 쪽팔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콩을 심을 땐 컴퓨터 게임을 했고 벼를 밸 땐 약속이 있다며 시골에 잘 가지 않았다. 이제는 다 함께 시골을 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화분장사 이후에 엄마는 봉명동 근처의 칼국수가게를 냈다가 금방 망했고, 백석동 삼성에 있는 식당에서 일했다. 엄마는 오랜 우울을 앓았고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오래 모른 체 했다.
스무살이 넘고 동생이 군대로 사라졌던 때, 부모님은 공주 시골의 버려진 집에다 야금야금 살림을 꾸렸다. 집 값보다 비싼 수리비를 들여 고치고, 도시에서 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일을 했다. 하던 일에 더해 돌봐야 할 땅과 작물과 동물들이 늘어났다. 어느 해엔 닭과 염소를, 어느 해엔 대왕 호박을, 어느 해엔 슈퍼옥수수를 심었다.
엄마가 호기심 많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며 잡스럽고 끈기없는 없지만, 다시 호기심 많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유전자란 강력한 것이어서 나도 어딘가 좁은 땅만 생겨도 고추나 바질같은 것들을 심어댔다가, 금방 죽이고 다시 가지와 호박 같은 것들을 심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요새 안부 대신 이런저런 키우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닭이 산 속을 헤짚느라 사료값은 들지 않지만 다만 달걀을 찾으려면 온 산을 뒤져야 한다는 말, 올 해는 정말 고추를 조금만 심는 대신 산마늘에 중점을 둘 거라는 말, 장아찌를 만들테니 팔아보라는 말, 나도 지지 않을세라 스티로폼에 막 고추 모종 세 개를 사서 심었다는 말, 대추토마토 모종이 하나에 2000원이라며 믿을 수 없다는 말.
우린 그런 말을 나누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
식물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찾다가 결국에는 또 엄마얘기.
왜 이렇게 자꾸 엄마얘기를 쓰는지는 잘 모르지만 충분히 많이많이 해두고 싶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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