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 멤버들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놈팽이들.
노는 것 꼬박 챙겨 잘 노는 편이라지만, 얼굴은 누렇게 뜨고 눈은 퀭하고
다크서클은 턱밑까지 내려왔고 밤샘에 떡진 머리는 기본이다.
그렇다. 내일의 놈팽이를 담보로 오늘 밤을 새는 우리는
자본주의의 몹쓸 부품의 한 조각에 불과한 대체재일 뿐일런지도 모르겠다.
거북목과 어깨결림과 맞바꾼 생산물이 어느정도의 쓸모로 세상에 존재하는지 의문스럽지만,
그래도 이 정도 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작업물을 꺼내 본다.
5. 공공운수노조 간부교육과정 안내 포스터
2절 사이즈로 인쇄하는 포스터는 작은 디테일도 중요하다.
꼭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폰트를 만들어 보는 일인데, 폰트까지는 아니어도 슬로건 글자를 모듈형으로 만들어 봤다.
하루 하루 배움으로 성장하는 새싹의 모습을 담고 싶었고 잎맥처럼 연결되는 선을 넣어
여러 잎들이 연결되어 함께 성장하는 든든한 나무를 표현하고 싶었다.
작은 디테일이 살아 있어 작업하고 좀 뿌듯.
군중들 속에서 지워야 할 사람이 있는 수정작업은 쫌 고난의 과정.
4. (수원) 행궁동 동네잡지 <동네미술> 예술가편, 주민편
완벽한 기획, 깔끔한 원고 정리, 충분한 예산으로 하고싶은 디자인도 맘껏 실험해 볼 수 있었다.
<동네미술 1호 - 예술가편>은 실험적인 판형과 마분지 합지와 무지개박을 넣은 독특한 표지,
중간중간 종이도 달리 쓰고, 누드실제본에 중간의 4면이 대문처럼 접히는 제본도 해 볼 수 있었다.
가능할까 싶었던 것들을 이것저것 실험할 수 있어서 만드는 과정 내내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맘 졸였던 기억.
<동네미술 2호 - 주민편>은 1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서 그것 또한 소소한 재미가 있었고
주민들의 이야기 컨텐츠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3. 대추리 작물도감
편집디자인을 요리에 비교하는 일이 많은데, 그만큼 재료가 중요하다는 얘기.
대추리 마을에서 정성껏 기른 작물맨치롬 신선한 일러스트 재료들 덕에 눈호강하며 작업할 수 있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로만 채워져서 산만하지 않고 정돈된 느낌,
여기저기 쓰임새가 많을 것 같은 점 또한 맘에 들었다.
좋은 종이를 썼음에도 뒷부분의 인쇄가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인쇄 감리가 중요한 이유. ㅠㅜ
2. 416연대 소식지 창간호 <사월십육일의약속>
세월호 관련한 지역활동을 꾸준히 만들고 참여하고 알린 때문일까?
2020년 수원416 운동기록집을 만든 것이 인연이 되어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의 소식지 창간호 작업을 맡게 되었다.
본격적인 편집디자인 전에 기획팀과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쳤다.
회의에 편집디자이너가 초대된 경험이 거의 없기에 그 경험 자체도 신선했다.
과정 전체를 공유하는 일, 참여한 사람들과의 합의의 과정,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의 구분 등등...
조금은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의뢰인과 함께 <협업>을 하는 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보통의 작업은 계약관계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을'로서만 존재한다고 느껴지기 십상이다.
발언권은 고사하고 어느 순잔 자판기나 로봇처럼 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대부분인데
416연대 소식지 작업은 일의 캐미스트리를 느끼며 수정할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좋은 경험을 했다.
소식지를 모조지에 인쇄를 했는데 날씨가 습해 인쇄가 썩 만족할만 하지는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모조지는 역시나 햇빛 쨍한 날에 인쇄를... 그러려면 작업기간을 더 확보하는 일이 중요!
1. 이하야 토모요 작품집 <PATHS>
태어나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 티벳어로 채워진 인쇄물을 만들게 되었다.
볼 수 있지만, 읽을 수 없는 언어의 세계로 작업하는 일. 쏠쏠한 재미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이곳까지 이끈 인연들이 놀랍고 신비하다. '결국, 이런 일을 하게 되었구나',의 느낌이랄까?
10년 전 행복한고민 2호의 취재를 위해 갔던 티벳독립을 위한 카페 <사직동 그 가게>.
북인도 라다크 여행에서 만난 티벳불교 사원과 룽다의 티벳어.
몽골 여행에서 만난 진용주 대장님의 탑돌이 기도.
린포체라는 티벳불교 승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
그리고 경계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작품으로 기도하는 이하야 토모요 작가의 만남.
그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진 것 같아 이 프로젝트를 제안받은 것만으로도 기뻤다.
표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작가는 의견을 받아 프로젝트를 위한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조금씩 틀이 잡히고 디테일을 쌓아갔다.
(우린 서로의 언어를 잘 모른다. 그래서 소통을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뻔질나게 이야기가 오간다. 일 얘기 반, 사는 얘기 반)
세계의 많은 이들이 번역과 교정에 힘을 보탰다.
한국, 일본, 대만, 캐나다, 북인도, 티벳의 친구들이 함께 만든 결과물.
예정보다도 훨씬 많은 기간이 소요되었지만,
이제 곧 기도하는 마음이 세상에 나온다.
끝까지 무탈하게 나오기를!
이하야 토모요의 <PATHS> Zine은 6개의 리플렛으로 구성되었고,
한국어, 영어, 일본어, 대만어, 티벳어 5개국어로 나올 예정이다.
놈팽이들,
오늘도 일하는 놈팽이들.
미래의 놈팽이가 지금 이곳에 현현하기 위해
오늘도 몸부림 맘부림 중이다.
돌이켜보니 열심히 살았네, 열심히 사는 것도 조금은 괜츈하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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