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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인디] 멀고도 험난한, 하지만 다다라야 할 사과의 길

돌이켜 보면 비교적 가벼운 일에는 즉각적으로 버릇처럼 사과를 하곤 하지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순간에 제대로 사과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매뉴얼 없는 곤란한 상황에 닥쳤을 때 일단 그 상황을 모면하고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아니, 단지 그 뿐이었을까? 여전히 스스로를 괴롭히는 지난날 저질렀던 잘못을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꺼내 본다.(그렇다! 대부분의 잘못은 밝히기조차 힘들구나!) 제 때 제대로된 사과가 늘 힘들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게 잘못인지 몰랐던 때가 많았다. 이런 경우 되레 적반하장이 되어 나를 공격해 온다고 느낀다. 똥 뀐 놈이 성내는 것과 같은 경우.
국민학교 중간체조 시간, 줄넘기를 하다가 뒤에 있는 친구를 줄로 쳤나 보다. 친구는 갑자기 화를 냈고. 당황한 난 그런 적 없다고 항변을 했다. 줄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조작된 기억일 수 있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소동에 휘말리는 순간을 피하고 싶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보다도 내 잘못으로 커지는 여파를 바라보거나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수도. 내가 아는 사실보다도 상대가 입은 피해와 고통에 귀기울이자.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다.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다. 스스로가 아는 사실이 전부일 리 없다. 

>> 저지른 잘못을 깨우치자.

잘못을 인지하더라도 인정하기는 쉽지 않더라. 그래서 본능적으로 상황을 빠져나갈 궁리의 시스템이 작동한다. '내가 백퍼 잘못했을 리 없어'라며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그려낸다.
중학교 하교길, 친구들을 넘 좋아해서 몇 정류장을 거슬러 함께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곤 했다. 그 날은 친구 서넛이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삥뜯는 형을 만나 으슥한 곳으로 끌려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당시 넘 작고 말랐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만 돌려보냈다. 그 후의 상황이 눈에 훤히 그려졌지만, 그곳으로 돌아갈 용기도 친구에게 말을 걸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대로 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왔다. 다음날 친구에게 사과를 했는지 쭈뼜거렸는지 생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잘못은 저질러진 일이다. 빠르게 인정하자.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사과의 말과 행동까지 가기도 어렵다. (잘못을 저지른 주제에) 말하고 나면 왠지 억울하고 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상대가 그저 스리슬쩍 어물쩡 넘어가 주기를 기대한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계속 문제 제기하는 상대가 왠지 쪼잔하고 끈질긴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약자의 편에 서 주질 않는다. 버틸수록 유리한 건 강자의 입장.
고등학교 1학년에 반에서 1, 2, 3, 4, 5번이던 우리들은 사이가 각별하고 돈독해서 주변에서 우리를 두고 빽줄클럽이라고 불렀다. 빽줄은 포커 은어로 1부터 5까지 스트레이트 조합을 말한다. 꼬꼬마 애들이 얼마나 몰려다녔으면 그룹별명까지 생길 정도였겠는가. 그당시 에이스(1번)이었던 나는 2번 친구와 시험 때 친구와 컨닝을 했다. 죄책감 없이 누구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고 좀더 기발한 컨닝방법을 고안해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2번 친구와의 컨닝을 3번 친구에게 들켰다. 얼굴이 이내 붉어졌지만, 친구에게 사과는 커녕 컨닝의 세계에 끌어들이려 했다. 친구는 거부했고 함께 몰려다니던 빽줄클럽도 거부했다. 이내 다시금 친해졌지만, 누구도 그때의 일을 먼저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생각만으로 반성의 마음은 전달되지 않는다. 미안함을 행동으로 표현하자. 사과의 첫단추가 꿰어졌다.


말로, 행동으로 표현했지만 상대가 다른 식의 사과 표현의 수위를 제시한다면 받아들이기 더 힘들어질 테다. '어쭈, 내 사과를 안 받아들여? 그렇다면 사과를 철회하는 수밖에. 인연 끊고 지내도 손해 날 것 없지 뭐.'라고 생각하는 것도 강자의 입장.
오랫동안 지내온 천안 지역을 떠나 예산으로 이사 오기 전 마음이 분주하고 피폐해 있었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의 하나로 마음에 걸리는 사람 몇몇을 찾아가 사과하는 일을 했다. 아직까진 다행히도 사과를 표현하면 대부분 다 받아 주었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리라 짐작했던 상대도 흔쾌히 사과를 받아주어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내가 제안한 사과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오해만 가중시키는 방향이었다면, 전혀 다른 방식의 사과를 제안한다면, 그 때가 도래할 때 피하지 않고 대면할고 겪어낼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 내 잘못으로 인해 받을 상대방의 괴로움을 스스로 재단할 수는 없다. 상대가 원하는 방식의 사과를 준비하자.

이런 식으로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과를 건네는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인식>인정>표현>소통 으로 가는 사과의 길. 그 길의 마지막에는 잘못에 응당하는 보상이 따라야겠다. 법적 책임이든 다친 마음에 대한 모종의 대가나 배려 등. 저질러진 잘못을 쓸어 담을 수 없으니 말로만 퉁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햐 마땅하겠다.

가볍게 사과를 주고 받는 일도 많지만 사과의 주고받음이 곤란한 상황이 생기는 건 대부분 힘의 불균형 때문이라 생각한다. 스스로가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 사과를 표하는 일은 더 꺼려지기 십상이다. 반대로 약자는 사소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강도높은 사과를 요구받는 일이 허다하다. 또한 강자는 쉬운 용서를 할 뿐 사과하지 않는다. 그렇게 약자를 부리는 강자일수록 자신이 사과할 상황이 될 때 제대로 사과할 줄 모르게 된다.
그리고 사람은 늘 약자의 위치에 있지는 않다. 복잡한 위계와 정체성 안에서 떄론 강자로 위치하게 되고, 때론 약자의 위치에 서곤 한다. 원컨 원하지 않았건 가진/못 가진 스스로의 권리와 권력의 작용을 살펴보고 자신의 가진 잘못의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면서 폭력과 혐오, 배제와 소외를 하지 않도록 하는 안테나를 세우며 살 일이다.
이를테면 어떤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밖에 끊임없이 연결되지 않는 한 배제와 소외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나의 지난날의 대부분은 무리를 이루는 순간 배제하고 배제당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늘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배제당하는 쪽보다 배제하는 무리에서의 이탈이 두려워 입을 닫았던 일들에 대한 괴로움이 늘 있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는 다양하고 다채롭다. 관계 안에서 충돌은 일어날 수밖에 없고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 또한 제각각이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부분을 엄격하게 하고 어떤 부분을 말랑하게 만들어야 할런지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사과를 하는 방법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사과를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이다. 사과를 주고받는 일은 상호작용이니까. 일방적인 화살표가 되지 않기 위해 사과를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라 여겨진다. 사과를 하는 주체와 사과를 받는 주체 모두 잘못의 행위와 말에 집중을 해야지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한 인간 자체에 대한 조리돌림이나 낙인으로 가는 일은 지양해야겠다.
또한 약자/피해자로서만 자신을 정체화시키는 순간 자신이 저지를 잘못 또한 인정하지 않게 된다. 안전하게 여겨지는 그늘처럼 약자의 입장으로 숨어들어가면 별개의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약자화(化)하기 십상이기 떄문이다. 그런 상황은 피해를 말 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리기도 한다. 

사과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넥스트 레블로 가기 위해 감정들을 배운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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