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엔 어마어마하게 넓은 면적의 예당저수지가 있어서 예산의 저수지 하면 곧잘 예당저수지를 떠올리지만,
농촌지역 답게 지역 곳곳에 작은 저수지들이 참 많다.
바다 근처에 사는 친구는 갇힌 작은 물이 답답하다며 별 흥미를 못 느낀다고 했지만,
사실 개인 취향은 산 속에 있는 연못 정도의 비교적 작은 물웅덩이를 좋아 한다.
저수지 주변길이 포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 더 좋고,
그 길이 저수지를 빙둘러 한바퀴 산책할 수 있는 길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주변 저수지를 소개 받기도 하고 탐험도 하면서 몇 군데 맘에 드는 곳을 발견했는데,
그 중하나가 대술면 시산리에 있는 시산지.
가끔 낚시 하는 분들이 있지만, 가는 길이 좁은 편이어서 인적이 드물어 호젓하니 분위기 있는 곳이다.
아쉽게도 한켠은 산자락이어서 저수지를 한 바퀴 다 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왕버드나무만으로도 갈 이유는 충분타.
제법 큰 편인데다가 수면으로 가지가 늘어져 있어 보자마자 내 맘 속에 저장!
시산지는 친구가 놀러 왔을 때 (소심하게) 소개하는 곳이자, 읍내에 볼 일이 생길 때면 오가는 길에 슬쩍 들러보는 곳이다. 갈 때마다 살짝살짝 달라지는 저수지의 풍경를 눈에 담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수달과 마주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고....
시산지로 가는 길은 좀 특별한데, 저수지에 다다를 때쯤 있는 좁은 길 양 옆이 사과나무 과수원이다. 예산에 널린 과수가 사과나무라지만, 이곳의 나무는 수령도 오래 되고 농부님이 나무를 살뜰히 살핀다는 것을 슬쩍 봐도 알 수 있다. 마치 정원수처럼 아름답게 손질된 사과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붉게 물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마침 오늘은 주인 아저씨와 우연히 마주쳐 직접 사과도 따고 수확한 사과를 사먹는 행운까지 누렸다.
그러니까 나에게 시산지란 그런 곳이다. 사계절을 온전히 한바퀴 돌아 농부가 애지중지 키운 사과의 맛같은 곳.
지지난 주 주말이었나? 그때도 수줍게 시산지를 권했고, 그 전까지 보지 못했던 현수막을 하나 발견 했다. 관광지도 아니어서 외부에서 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이 마을 입구에 떡하니 걸린 현수막. 문구가 너무 맘에 들어 이내 문구에 쓰인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궁금해 졌다. 나무를 파는 이는 누구고 나무를 지키는 이는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어떤 상황인지, 어떤 마음인지도 궁금했다.
농촌의 풍경 하면 떠오른 단어는 뭘까? 녹색, 힐링, 벌판, 꽃, 논과 밭, 호젓함, 자연.... 그런 것이려나?
대한민국의 현실의 농촌은 송전탑, 도로, 혐오시설, 공장, 축사 등등으로 풍경이 바뀌고 있다.
힐링타령하는 도시인의 에너지와 교통, 통신, 먹거리를 위해 손을 내어 주고 발을 내어 주고 머리와 심장 모두다 내어주어 피폐함 그 자체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산군청에 출판 등록을 하러 가는 날, 문화관광부에 학예사로 있는 친구를 만났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예산의 나무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그동안 모아온 예산의 나무들 리스트를 출력해 주었다. 어떤 기준으로 고른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예산 곳곳에 있는 마을사람과 함께 해온 나무임이 분명했다. 그리곤 이내 며칠 전 시산리 마을입구 현수막이 생각나 그 나무를 찾아 가 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모르는 주민 분들이 많았는데 현수막이 걸린 곳 근처에서 마침 닭모이 주러 나오신 주민의 안내로 느티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느티나무는 총 세 그루인데 한 몸처럼 보였다. 그 중 한 나무는 가지가 잘려나가 죽어가는 중이었고 가운데 나무도 살아는 있지만 가지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다.
나무 아래론 실개천이 흐르고 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소박한 마을이 보인다. 오랜 시간 동안 마을입구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나무 아래의 땅.
원래 누구 것인지 모를 그 땅의 주인은 그 땅을 팔고 싶었나 보다. 세월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는 그 나무를 없애고 싶었나 보다. 나무의 잘린 두 팔이, 두 다리가 도시인들에게 상납되고 있다. 그들의 에너지를 위해, 속도를 위해, 편리를 위해, 풍요를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이장님을 만나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예산에서 일 벌이는 게 엄두가 나질 않는다. 희미한 계획이지만, 친구의 리스트에 나온 나무들을 철마다 찾아 다니고 기록하는 일을 하고 싶다. 사진 기록과 더불어 동네 어르신들의 마을 이야기도 함께 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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