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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무너진다는 것

간밤에 내린 비로 하루 사이에 풍경이 완전 달라졌다.
어제 본 풍경이 맞는지 싶을 정도로 불어난 하천의 물, 무성하던 풀들은 모두 누웠고
밥 아저씨의 그림처럼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서운 자연, 아니 어리석은 인간.

촌구석으로 이사온 후 집에서 고양이랑 보내는 시간도 좋지만,
바로 집 옆 작은 언덕과 오솔길 따라 갈 수 있는 작은 동산이 지척에 있어 좋았다. 
작업실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주변이 묘한 분위기에 휩싸일 떄가 있다. 미묘한 광선의 차이로 오는 표현하기 힘든 시각의 차이를 감지하곤 하는데 뭐랄까 어스름의 빛깔이 서서히 주변을 파고 드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마우스를 내팽개 치고 후다닥 집을 나서서 언덕을 올라 밭 사잇길로 달음질 친다. 아니나 다를까 서쪽하는 뿐 아니라 360도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다. 서쪽 하늘 뿐 아니라 반대편의 구름색도 칠해진다는 사실을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었다.

한때, 노을이 주는 황홀경에 빠져 노을을 볼 수 있는 최적의 풍경을 찾아 다녔다.
첫 픽은 블로그에서 추천한 예당호. 직접 가보니 웅장하고 예쁘긴 하지만 차로 가기에는 조금 먼 편이기도 하고 좀더 친근하고 비밀스런 곳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집근처의 하천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작은 하천들이 만나며 큰 내가 되어 예당호로 흘러들어가는 관문같은 곳인데 맘 속에 그렸던 곳과 딱 맞아 떨어지진 않지만 쏘쏘 낫배드 정도로 점찍어 두곤 일몰 시간에 맞춰 그속에서 물결을 바라보고 멍때리는 시간을 갖는 루틴을 만들었다. 좀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일종의 기도의 시간으로도 볼 수 있는데 주로는 안부인사에 가깝기도 했고 감사의 표현을 하기도 했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기도 했으며 슬픈 감정을 흘려 보내기도 했다.
외딴 곳은 아니어서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이 왕왕 있기도 했지만 보통은 시끄러울 일 없이 한적한 곳이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출근길 코스 중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진입하는 지점. 다리를 건너는 순간부터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드를 전환케 한다.
바로 어제도 출근하며 건너고 퇴근하며 건넜던 그 다리.
그곳으로 진입하는 언덕의 흙이 큰비에 휩쓸려가 도로가 끊기고 말았다. 시멘트 밑의 흙이 유실된 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물이 아찔했다. 뉴스에서 보던 풍경을 아무 준비 없이 맞딱드리는 충격은 쎘다. 도로의 파편들 만큼이나 마음이 주저앉고 조각났다. 절망감은 이런 식으로 오게 되는구나. 당연히 있을거라 생각했던 자리에 없는 것, 찢어지는 것, 무너지는 것, 내려앉는 것, 사라지는 것, 되돌릴 수 없는 것.

강정의 구럼비 바위, 세월호를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감정이 구체화/실체화 되어 실재의 시각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뉴스에서 어디어디 다리가 끊기고 집안으로 물고기가 들어왔고 마을이 고립됐다는 소식을 들어도 안타까운 감정이 스칠 뿐 절망과 고통의 감정 언저리에도 가닿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자는 '성수대교도 무너지는 나라에서 겨우 촌구석 도로 하나 무너진게 뭐라고 호들갑?'이랄 수도 있겠지만 어리석은 난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그곳은 언제나 지속되리라 생각했던 내 안식과 안락의 자리. 그동안의 기도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자리. 수줍게 추천하며 걸었던 친구들과의 기억의 냄새가 밴 자리. 매일에 매일을 보태던 희망의 자리였던 것이라는 것을.

날씨가 좋아지면 서둘러 공사를 하고 전보다 튼튼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바뀌겠지만, 그 전의 시간을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어쩌면 감당이 안되었을 수도 있겠다. 지난 시간들을 큰 비가 모아모아 휩쓸고 가버려 내가 모를 곳으로 떠나 보내도 좋은 거 아닐까도 싶었다. 절대, 결단코 예전 같을 수는 없을거라는 절망이 주는 안정의 품으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이 움찔거렸다.
여름이 한창이었을 무렵 천변에서 맥주를 찌끄렸던 친구가 생각나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선 폭포수처럼 굉음을 내며 흐르는 보의 흙탕물 너머를 봤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천변의 공간을 철마다 예쁜 정원으로 가꾸는 아주머니가 그 시간 어김없이 나타나서 쓰러진 화초를 돌보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 조금 가라 앉았다. 흐뭇한 미소가 생겼다. 그 순간 거침없이 내려가는 물줄기를 거슬러 물고기 한마리가 점프를 했다. 물론 연어는 아닌데 제법 큰 물고기였다. 

개운한 마음이 된 건 아니지만 이웃님 개를 반갑게 맞을 기분은 된 것 같다. 강해와 함께 산책할 시간이다. 
또다시 기도를 모아 봐야겠다. 차곡차곡 쌓일 기도가 아니었나 보다.
아니, 한곳으로 그러모으기 보다는 세상에 흩어질 기도를 해 보는 것도 좋겠다.

집 바로 뒷동산의 노을
예산노을의 크라쓰
천변의 꽃정원 + 동쪽하늘의 물든 구름
기도의 공간에서 기도의 시간
무너진 도로

 

천변공원을 가꾸는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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