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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종교는 없지만 말입니다요

종교는 없지만, 종교건물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경건해야 할 것 같고, 숙연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마저 기분 좋은
은근하게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는 차분한 기분이 되는 과정이 즐거우니까.
(어린 시절 장롱 속에 들어가 두꺼운 이불 사이에 눕곤 했는데
무거운 이불이 짓누르는 느낌이 제법 좋아 그안에서 잠들 때가 종종 있었다. 마치 그런 느낌??)
방방 뛰는 마음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흔들 하다보면 금세 풀이 죽는데,
평소엔 우울감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더 큰 편이지만,
왠지 우울할 정도로 차분한 마음을 찾고 싶을 때,
하늘까지 올라갈 것처럼 붕 뜬 마음이 불안한 고도까지 올라 갈 때 쯤
불현듯 종교건물-교회, 성당, 절-이 그리워진다.

딱히 맘이 삐죽했던 건 아닌데 아산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 김에 돌아오는 길에 대한성공회 예산성당을 찾았다.
예산에 이사 오기 1~2주일 전쯤 (이젠 이웃 주민이 된 전 집주인) 윤정 누나의 소개로 이곳을 처음 방문했다. 
윤정누나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솔깃한 강의가 있다며 함께 가자고 제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정하는 서몽골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였다.
서몽골홀릭인 나는 곧 이사할 예산이라는 지역에서 몽골의 이야기를 듣게된다는 우연이 주는 자리가 넘 신기했다.
장소가 나의 이사를 환영해 주는 느낌이었달까?

처음 도착한 성당의 분위기가 기대보다도 훨씬 좋았다. 오래된 건물, 소박한 면적.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그 분위기만으로도 이내 이곳이 좋아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1920년대에 같은 장소에 교회(성당)건물이 처음 세워졌고 1970년대에 지금의 건물로 신축했다고 한다. 
교회 건물 옆엔 지금은 운영하고 있지 않은 유치원이 있다.
성당을 비워둔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철거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3년전 대전에 살던 'ㅅ'신부님께서 이곳으로 사역을 오셨다 한다. 
건물의 역사성의 가치를 알아보고는 이곳을 수선하며 보존하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예산까지 오셨다.

건물이 낡긴했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형태의 구조미가 돋보이고
딱 적당한 규모가 주는 소박함, 낡은 것이 주는 더께의 세월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건축물의 백미는 창문이다.
지그재그 형태의 벽에 세로로 난 창문은 그날의 햇빛에 따라 실내의 채광이 달라져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생활감과 성스러움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누구나 오가는 낮은 문턱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신부님은 이 건물 옆의 공간을 개조해서 빈티지풍의 서점 겸 카페 겸 케뮤니티 공간을 만들고 계시는 중이다.
공간이 꾸며지는 과정을 몇 차례 볼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 세번째.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신부님 취향 참 멋지다.
꼭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
최근에 들여 놓은 것들인데도 10년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 오늘 빈티지 소품 괘종시계가 택배로 도착했나 보다.
우연히 들렀는데 어쩌다 보니 언박싱의 순간을 함께하게 되었는데,,,,,
완전 딱 내취향! 넘나 멋진 컬러의 태엽으로 밥주는 열쇠까지 있는, 숫자폰트마저 사랑스런 그런 시계였다.
그 공간에 있었어야 할 물건이 후다닥 날라 온 느낌이랄까?
공간을 대표할 물건인 것만 같았다.

신부님은 꿈돌이. 이곳에서 할 일들이 엄청 많으신 듯 보였다.
내년까지는 공간을 정리하고 저원을 가꾸고 틈틈이 지역커뮤니티를 만들고
고령화되는 농촌 사회의 어르신을 껴안는 일.
어반스케쳐와 콜라보로 책도 만들고 싶고, 좋은 영화도 함꼐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고 한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열거한 일 중 한꼭지를 담당할 것만 같은 촉이 왔다.
하게된다면 기꺼이 하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분이기에,
재밌게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욕심이 났다.

신양면의 촌뜨기가 드디어 8개월만에 읍내로 진출하게 되는건가?
그러고 보니 이사온지 8개월이 되었지만 읍내에 갈 일은 생각보다 적어 손에 꼽을 정도이다.
곧 보폭을 넓혀 지역에서 재미난 일들을 사부작사부작 해 봐야 겠다.
천천히 가능한 만큼, 지치지 않을 정도로만.

대한성공회 예산성당
반할 것 같은 쉐잎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그러고 보니 오늘 오랫만에 햇빛 만끽
이렇게 창문이 숨어 있어요
빛이 그림을 그리는 오후
1965년 신명유치원의 앨범을 보여주셨는데
이 멋진 폰트들의 향연!
목조건물 시절의 신명유치원. 사랑스럽!
커뮤니티 공간이 될 서점&카페
오늘 도착한 빈티지 괘종시계. 1940년대 산이라고...
블라인드 설치 전 카페 창문. 신부님은 식물들을 소중히 가꾸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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