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며칠 전 허리를 삐끗했다. 테라스를 쓸다가 마당비를 잡고 그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힘을 준 것도, 허리를 세차게 돌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푹 내려 앉는데 순간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정은 어떻게 하지? 많은 스케쥴과 약속은 어떻게 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단 사실에 좀 당황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 중요하지 않은 날이 없는데
괜한 욕심에, 핑계대기 싫은 마음에, 미루면 돌아올 파장에
몸을 돌보기보다 좀 무리하는 편을 택했다.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사소한 습관들이 쌓여 조금씩 어긋나 결국 벌어진 일은
수많은 전조로 신호를 주었지만 무시해서 나타난 결과라는 걸 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회복은 어렵고 습관은 더더욱 고치기 힘들어
전보다 빠른 주기로 몸의 이상 징후가 나타나리라는 것도 안다.
안다고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잘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내 몸뚱아리에게 석고대죄라도 할 판이다.
2.
금요일 저녁 마르코 책방 릴레이 영화 상영,
혼자를 기르는 법 두번째 시간 <죽여주는 여자>를 관람했다.
게으름을 한껏 피우다 아슬아슬하게 한의원 갈 시간을 놓쳐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영화를 봤다.
얼핏 그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이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면 난 그냥 죽는데네, 이게 고독사인가?
고독사 별 거 아니네. 죽는 건 다 똑같은데 왜 누군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걸까?
그냥 혼자 죽으면 안되나?' 싶은...
그러다가도 '삼동이 밥은 누가 주지? 그래도 일주일 안에 발견은 되겠지?
누군가가 데려다 잘 키워 줄거야, 암! 넘 걱정은 말자'라는 생각도 들다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인 것 같다.
삶의 다채로움은 죽음 앞의 유한성과 공평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거니까
죽음 앞에서만 현재는 빛날 수 있는 것 같다.
매초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면서도 늘 잊고 지내는 것처럼
살아있음을 느끼려면 늘 죽음을 상기하는수밖에 없다.
3.
죽은은 의외로 간단 할 수 있다.
생과 사야 말로 이분법에 가까울 정도로 덜 복잡한 경계에 있으니까.
(물론 그 경계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복잡 미묘할 테지만,,,,)
죽음보다 두려운건 살아있어서 느끼는 감정들일 테다.
외로움, 소외감, 슬픔, 불안, 걱정 등등의 감정들.
혹은 나이듦, 아픔과 같은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부자유함에서 오는 곤란.
생명의 유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곧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라는 질문이 되곤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은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처럼 젊은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다 라는 말로 통용되어 쓰이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나이가 찼다고 모두 어른은 아니다'라는 말과도 같다.
나이만 들었지 어른이 되지 못한 삶들을 볼라치면
어른이 된다는 것도 준비와 단련이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4.
세상에 태어난 것도 처음,
어른이 되는 것도 처음,
늙어가는 것도 처음,
죽을 때까지 매 순간이 처음 겪는 일이기에 겁이 나는 건 사실이다.
어떻게 나이들어야 할지, 어떻게 죽음을 바라봐야 할지,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늘 큰 숙제다.
나에게는 처음이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힌트를 늘 던져주는 어른들이 계신다.
난 언제 저토록 멋진 어른이 될까? 될 수나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분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나이든다는 게 하나도 두렵지 않을 안심과 든든함을 안겨준다.
그 안심이 물리적 고통과 아픔을 없애진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5.
2022년 첫번째 팽팽문화제는 열여덟번째로 <평화노래자랑> 컨셉에 맞춰
팽나무 아래서 노래자랑 잔치가 열렸다.
제일 먼저 신청하셔서 스타트를 끊은 분은 하제마을 옛 주민 여정진 님이셨다.
팝송을 근사하게 부르셨는데 점수가 아쉬우셨는지 나중에 흥이 오르셨는지 모든 참가자의 순서가 끝난 후
셀프앙코르로 <아파트>를 부르며 춤을 추셨는데 찐 흥겹고 귀엽게 춤을 추며 노래를 하셨다.
스트릿우먼파이터 언니들 싸움보다 더 멋진, 인생의 흥이 느껴졌다.
선물과도 같은 인생이라는 오선지에서 음표처럼 뛰어다니시는 그 모습을 보며
음치가 부끄러워 등떠미는데도 도망만 쳤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상하게도 인터뷰 때 눈물을 흘리던 여정진 님도 동시에 떠올랐다)
문정현 신부님은 당연히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강정마을 평화의 노래를 열창해 주셨다.
평화의 마음을 담을 때면 언제나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점도 정말 멋지고 존재로 많은 사람에게 큰 위안이 되는 분.
행사 내내 매운 연기를 마시며 지팡이로 화로의 불을 살펴주셨다.
작은 것 돌보는 세심함부터 우주로 뻗어나가는 담대함까지
촘촘함이 연륜으로 묻어나는 분, 아름답고 귀여운 어른.
평화바람 2호 잡지 잘 나왔다고 칭찬해 주시며 지팡이로 괜히 몇대 때리셨는데
궁디팡팡해주신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문화제도 소박하고 정겨운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행사 막바지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보적 에너지의 소유자, 오두둑 님이 사회에 끼어 들며 흥의 피치를 올려주셨다.
쑥쓰러워 망설이던 분들을 무대로 이끌고 마이크를 고루 분배하는 센스와 함께
넘치는 열정! 열정! 열정!으로 그야말로 무대를 뒤집에 놓으셨다.
그 긴 시간의 투쟁을 지속했던 힘은 역시 춤이었을까?
함께 즐기고 웃으며 어깨동무하며 춤을 췄기에 대한민국 평화운동은 한걸음 한걸음 나가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니카보다도 허니제이보다도 영리더 리정보다도 파이팅하는 에너지에
온 몸의 피가 끓는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귀여운 두둠칫 어른 세 분 덕에 30년 후의 미래도 조금은 들썩거렸다.
마음대로 몸이 따르지 않더라도 한두박자 늦게 다리가 올라가더라도 허리디스크에 주저앉을지라도
어디선가 춤을 추고 있을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틀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춤을 추고 싶을 때는 (빼지 않고) 춤을 추는 거다.
어린이든, 할매든, 할아부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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